(04/22) 주일예배 1부
페이지 정보
작성자 멀티팀 작성일18-04-28 22:28 조회228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세움교회 #주일예배 #1부 #김희규
“떠 넘김”
(눅 23:1~7)
빌라도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사도신경 속에서는 예수님을 괴롭힌 최고의 악당으로 느껴집니다. 최고로 비열하고 비겁하고 포악하고 간악한 인물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복음서를 읽으면 누구보다 예수님에 대해 객관적 긍정적 시각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을 끈질기게 살려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수많은 무리 가운데 예수님 편은 딱 한사람 빌라도뿐이었습니다.
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성도들 입에 매주 오르내리게 되었을까요? 빌라도 한 개인의 악행이 아니라 모든 세상의 권세를 뜻합니다. 아담이 인류를 대표하듯 빌라도가 예수님을 죽인 자들을 대표합니다.
헤롯도 있었는데 왜 빌라도를 콕 집었을까요? 빌라도의 마음 갈등을 살펴보면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 없음을 유일하게 안 사람, 죽이는 것은 옳지 않음을 안 사람입니다. 이미 산헤드린 공회에서는 사형을 선고했지만 형 집행권이 없기에 집행을 허락받기 위해 빌라도에게 몰려갔습니다. 빌라도는 너희 종교법으론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로마법으로 보면 사형을 집행할 이유가 아니라고 거부합니다.
둘째, 빌라도는 힘이 있었지만, 백성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민란을 일으켜 정권을 뒤집겠다는 기세를 보이자 흔들립니다. 빌라도는 돌파구를 찾기 위해 헤롯에게도 보내지만, 다시 돌아옵니다(눅 23:6~7). 헤롯에게 떠넘겼던 거지요. 유월절에 죄인 하나를 풀어주는 사면권으로 회중에 제안하지만 열심당원 바라바를 놓아주라는 요구에 부딪히곤 군중들에게 넘겨줍니다.
빌라도는 자기의 안전 기반이 위협받자 책임을 헤롯에게 떠넘기고 예수님을 군중들에게 넘겨줍니다. 일종의 자기합리화입니다.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 27:24)
이 땅의 대다수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안정된 삶이 위협받지 않는 선까지만 헌신합니다. 빌라도는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죄가 아님을 알면서도 자신의 안전과 안정된 삶을 위해 침묵한 데 대해 예수님은 고난받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수많은 죄악에 빠진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이루어진 것은 의인 10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도 존속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집단 회개가 아니라 모세 한 사람의 회개기도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양심은 죄를 죄로 여기고 악을 악으로 여깁니다. 죄와 악에 대해 아픔과 통증을 느낍니다. 죄를 죄로, 악을 악으로 알면서도 살아있는 양심이 침묵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가 양심대로 침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길 원했을지도 모릅니다. 죄 없는 자가 고난받고 고통받는 데 대해 비겁하게 침묵하면 고난받으시는 예수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안정과 앞으로 누릴 안정을 포기하면서까지 진리를 위해 끝까지 싸울 수 있는 능력을 구하십시오.
“떠 넘김”
(눅 23:1~7)
빌라도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사도신경 속에서는 예수님을 괴롭힌 최고의 악당으로 느껴집니다. 최고로 비열하고 비겁하고 포악하고 간악한 인물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복음서를 읽으면 누구보다 예수님에 대해 객관적 긍정적 시각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을 끈질기게 살려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수많은 무리 가운데 예수님 편은 딱 한사람 빌라도뿐이었습니다.
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성도들 입에 매주 오르내리게 되었을까요? 빌라도 한 개인의 악행이 아니라 모든 세상의 권세를 뜻합니다. 아담이 인류를 대표하듯 빌라도가 예수님을 죽인 자들을 대표합니다.
헤롯도 있었는데 왜 빌라도를 콕 집었을까요? 빌라도의 마음 갈등을 살펴보면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 없음을 유일하게 안 사람, 죽이는 것은 옳지 않음을 안 사람입니다. 이미 산헤드린 공회에서는 사형을 선고했지만 형 집행권이 없기에 집행을 허락받기 위해 빌라도에게 몰려갔습니다. 빌라도는 너희 종교법으론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로마법으로 보면 사형을 집행할 이유가 아니라고 거부합니다.
둘째, 빌라도는 힘이 있었지만, 백성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민란을 일으켜 정권을 뒤집겠다는 기세를 보이자 흔들립니다. 빌라도는 돌파구를 찾기 위해 헤롯에게도 보내지만, 다시 돌아옵니다(눅 23:6~7). 헤롯에게 떠넘겼던 거지요. 유월절에 죄인 하나를 풀어주는 사면권으로 회중에 제안하지만 열심당원 바라바를 놓아주라는 요구에 부딪히곤 군중들에게 넘겨줍니다.
빌라도는 자기의 안전 기반이 위협받자 책임을 헤롯에게 떠넘기고 예수님을 군중들에게 넘겨줍니다. 일종의 자기합리화입니다.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 27:24)
이 땅의 대다수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안정된 삶이 위협받지 않는 선까지만 헌신합니다. 빌라도는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죄가 아님을 알면서도 자신의 안전과 안정된 삶을 위해 침묵한 데 대해 예수님은 고난받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수많은 죄악에 빠진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이루어진 것은 의인 10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도 존속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집단 회개가 아니라 모세 한 사람의 회개기도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양심은 죄를 죄로 여기고 악을 악으로 여깁니다. 죄와 악에 대해 아픔과 통증을 느낍니다. 죄를 죄로, 악을 악으로 알면서도 살아있는 양심이 침묵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가 양심대로 침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길 원했을지도 모릅니다. 죄 없는 자가 고난받고 고통받는 데 대해 비겁하게 침묵하면 고난받으시는 예수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안정과 앞으로 누릴 안정을 포기하면서까지 진리를 위해 끝까지 싸울 수 있는 능력을 구하십시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